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오지마 전투 (문단 편집) === 일본군 === [[파일:attachment/GeneralTadamichiKuribayashi.jpg]] ▲ [[일본 육군|육군]] [[중장]]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후술할 해군의 이치마루 제독과 명목상 동급이었으나, 실질적으로 이오지마의 육해군 수비 병력 전체를 지휘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27px-Ichimaru_Rinosuke.jpg|width=150]] ▲ 이오지마의 [[일본 해군]] 측 최선임자였던 해군 [[중장]] 이치마루 리노스케 (市丸利之助) [[제독]]은 제27[[해군 항공대|항공]][[전대(군대)|전대]] [[사령관]][* 항공대는 진즉에 전멸하여, 잔존 병력은 모두 육전대로 편성됐다.]으로 [[해군 육전대]]를 이끌며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와 함께 이오지마 전투를 지휘했다. 이오지마 전투는 이전까지 해안가에 참호를 파고 적이 오기를 기다리던 일본군의 기존 전술로 맞서던 태평양 전선에서의 전투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당시 뒤늦게 이오지마 수비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장군의 전술에 기인했다.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던 그는 마리아나 해전에서 이미 해군이 무력화 된 이상 이오지마 방어는 사실상 강요된 자살행위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예정된 희생을 조금이라도 일본에 유리하게 이용할 방법을 강구했다. 그리하여 구상한 그가 생각한 방어 전술은 장기 방어전을 통해 최대한 미군의 희생과 출혈을 강요해서 본토에 시간을 벌어 주면서, 한편으로는 일본 본토 상륙을 눈 앞에 둔 미군에게 상륙전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겨서 일본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상황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는 패배를 기정사실로 상정하고 해안 방어 진지보다는 땅굴을 만들어서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고 전멸을 앞당기는 [[옥쇄]] 돌격을 엄격히 금지하고 가능한 오래 병력을 유지하면서 조직적인 전투를 집요하게 지속하기 위한 지침들을 만들어 부하들에게 숙지시켰다. 이는 '''상당히 유효한 조치였다'''. 만일 이러한 조치가 태평양 전역 모든 일본군 사령관의 기본적인 방침이었다면 미군의 진격은 아마도 2~3년은 더 지체되었을것이고 미군 또한 큰 피해를 감안해야했기 때문에 미국 정계에서도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모든 전쟁에서 패망 직전 상황에 처한 군대에, 그에 걸맞지 않게 유능한 지휘관이 투입되면 아수라장을 넘어 지옥도가 연출되었던 역사들 처럼 다다미치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실로 유능한 지휘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때문에 이오지마 역시 일본군, 연합군 모두에게 지옥도가 되었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의 새로운 전술 때문에 이오지마 전투의 시작인 해안 상륙 시점부터 미군은 전혀 낯선 전황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그 당시 일본군은 해안선 방어를 할 때 '군대는 상륙하는 그 시점에 가장 방어가 취약하다.'는 논리를 따라 상륙정이 다가오는 동안 해안선 가까이에 대기하다가 적군이 상륙하면 바로 그때 공격하는 전술을 취하였다. 문제는 이 전술은 공수 양측의 물량과 화력이 어느 정도 비등하다는 전제가 있을 때 성립한다는 것. 태평양 전역 곳곳에서 전력을 줄줄이 말아 먹고 본토마저 위협받는 이 시점에서 미국은 일본을 압도하는 물량과 [[화력]]을 지녔다. 객관적으로 상륙하는 시점이 가장 취약함은 맞지만, 미군은 이미 [[타라와 전투]]에서 일본군이 구축한 방어선에 호되게 데인 이후로는 상륙에 앞서 구형 [[네바다급 전함]],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테네시급 전함]], [[뉴멕시코급 전함]]들의 대구경 [[함포]]를 이용한 상륙 준비 포격[* 위엄 쩌는 파괴력으로 탱크와 비행기 잘 잡아먹기로 유명하던 독일의 [[8,8cm FlaK]]도 인치로 환산하면 3.46인치 정도 된다. 이 전함들이 구식이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무식하게 9문 12문씩 탑재하고 다니는 12~16인치 대구경포의 파괴력은 지상 공격용으론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155 mm(약 6.1인치) 곡사포의 살상반경이 50 m 정도이다. 미국의 전함 테네시의 14인치 함포의 별명은 '수영장 제조기'였으며 대공용 부포로 5인치(127 mm)를 달았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서부전선 사진들을 찾아보면 티거와 판터등이 통째로 뒤집혀 대파된 사진들을 볼수있는데 이게 대부분 전함보다 작은 구경을 주로 쓰는 미육군 포병대의 화력에 당한것이다. 육군포병이 아무리커봤자 8인치 전후였는데(그나마 [[M1 블랙드래곤 곡사포|240mm=약 9.45인치포]]가 있긴했다.) 네바다급, 펜실베이니아급, 테네시급, 뉴멕시코급은 14인치(356mm) 함포를 10~12문씩 주렁주렁 달고 있으니 파괴력은 비교불가이다. 그리고 [[전함]]은 주포만 달고 있는게 아니라서 5인치 6인치급의 부포도 대량으로 탑재하고 있으니...]과 [[항공모함]] [[함재기]]를 동원한 공습을 펼쳐 해안에 설치된 토치카나 방어선을 철저히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그랬기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 일본군은 해안선에 올망졸망 참호파고 모였다가 사이좋게 포탄에 맞아 사망하여 대다수 군부대가 작전불능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다음날 반자이 돌격을 감행하며 자멸하다보니 미군의 공세속도는 매우 빠를수 밖에 없었다. 구리바야시는 이런 해안선 방어 전술의 문제점을 곧바로 파악했고 이미 패배를 기정사실로 여긴 그는 새로운 전술로 전환한다. 그는 해안선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은 자살행위이니까 이를 중지시킨 뒤 해안선 안쪽으로 병력을 빼고, 부임 직후 곧바로 거대한 [[땅굴]]로 연결된 탄탄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다만 이오지마가 화산섬이라 [[유황]] [[가스]]가 많아 한 팀에 1명이 1분 간격으로 뛰어들어가 공사를 하고 바로 뛰어나오는 식으로 해야 해서 전투 당시 원래 계획의 80% 정도 완성된 상태였다.] 그리고 일본군의 고질병 [[반자이 돌격]]을 금해 쓸데없이 나가 죽기보단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서 저항하도록 명령했다.[* 이런 전술은 후일 [[오키나와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단, 어디까지나 옥쇄를 주 목적으로 하는 자살적인 공격을 금지한 것이지 반격 자체를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쿠리바야시는 필요하다면 화력 지원 하에 소규모로 국지적인 반격을 가하는 것은 허용했는데, 이때 적에게 이동할 때에는 사격을 가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은엄폐 및 기도비닉을 유지하라고 강조했다. 기존의 반자이 돌격은 말이 공격이지 사실상 얌전히 자살하는 식으로 옥쇄하느니 적에게 총 한방이라도 쏴보고 죽겠다는 생각으로 가하는 경우가 많아 은엄폐를 별로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에 비하면 상당히 합리적인 명령이었다.] 이렇게 구리바야시의 현실적이고 효율적으로 구축된 방어망으로 인해 미군은 기존 그대로 3일간 무자비 포격을 가한 뒤 당당하게 상륙했으나 땅굴로 인해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일본군의 땅굴 벙커에 의해 이제까지 태평양 전선에서 마주쳐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일본군을 맞이하였다.[* 사실 [[펠레리우 전투]]에서 일본군도 이오지마 전투와 비슷한 방식으로 미군을 괴롭혔지만, 펠레리우 전투가 워낙 무명이라 이 쪽이 더 많이 알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